한계에 다다르는 자동차 경쟁
브랜드가 판가름한다

작년 5월 프랑스의 푸조 CEO인 린다 잭슨이 한국을 찾았을 때 스텔란티스코리아 관계자들은 어디를 보여줄지 고심하다가 하남 스타필드에 그를 데려갔다고 합니다. 요즘 한국에서 소비자들을 만나는 최전선 중 하나인 복합 쇼핑몰을 보여준거죠. 하남 스타필드에는 10여개의 자동차 브랜드들이 상설 전시장을 두고 있고, 적잖은 브랜드들은 신차가 나올 때 마다 수시로 팝업스토어도 엽니다. 한국에서 고전하는 푸조의 문제점이 뭔지 머리를 맞대는 과정이었다고 합니다.

하우브 오브 지엠의 모습/GM

푸조의 제품이 잘 알려지지 않은걸까요. 아닙니다. 자동차업계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푸조라는 브랜드 자체가 좀 애매해졌다는 반응이 나옵니다. 차를 고를 때 대안으로 많이 떠오르지 않는달까요. 그렇다고 그 브랜드 자체가 매력적이란 인상도 크게 주지 못하고 있다합니다. 제품 자체는 소비자가 마음만 먹으면 볼 수 있는 기회는 많습니다. 스마트폰만 켜면 수많은 정보가 그 안에 있죠. 요즘 소비자들은 시승을 해봐야 겠다는 마음을 먹기 전까지는 온라인에서 주로 정보를 찾으니까요. 결국 제품 경쟁력도 중요하지만, 그 제품에 관심을 갖게 만드는 브랜드의 힘도 중요한 것 같습니다. 하남 스타필드에서 이들은 과연 어떤 해답을 찾았을까요.

르노코리아가 프랑스 브랜드라는 걸 홍보하는 장면/르노코리아

브랜드 파워에 대한 고민을 하는 자동차 기업들이 부쩍 늘었습니다. 공교롭게 또 프랑스 브랜드 얘기를 하나 더 하죠. 바로 르노코리아입니다. 르노삼성이었다가 삼성을 떼낸 이 회사는 최근 ‘프렌치 감성’ ‘120년 르노’ ‘세계 1위 프랑스 자동차 브랜드’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르노삼성 시절 만든 ‘태풍의눈’ 로고도 떼어낸 채, ‘로장주’(마름모) 로고를 앞세웠죠. 일각에서는 르노코리아의 불가피한 전략이란 말도 많습니다. 르노가 올해 국내에서 선보일 수 있는 신차가 없어서죠. 작년에도 그랬습니다. 페이스리프트로 디자인이나, 수납공간 등을 조금씩 바꾸고 가격을 내려도 소비자들이 꿈쩍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런 시기가 오래되자 브랜드의 힘이 빠졌습니다. 푸조랑 비슷하죠. 소비자들이 관심을 갖지 않는 브랜드가 되어가는 겁니다. 하반기 오랫동안 기다려온 완전 신차 중형 SUV 하이브리드가 나오는데요. 다소 과장해서 회사 존속에 결정적인 역할을 할 이 차 출시를 앞두고 브랜드를 강화한 결과가 어떨지 궁금합니다.

 

작년 분위기가 좋았던 GM(제너럴모터스)도 비슷합니다. 여기는 ‘정통 아메리칸 브랜드’라는 걸 앞세우고 있습니다. ‘한국GM’이라고 불렀지만, 요즘에는 그냥 제너럴모터스 또는 GM 한국사업장이라고 스스로 칭합니다. 한층 더 미국 정통성을 강조하는 거죠. 특히 이 회사는 작년 강남 도산대로에 ‘하우스 오브 GM’이라는 브랜드 숍도 열었습니다. GM에는 한국 공장에서 생산도 많이 하는 쉐보레 브랜드 뿐만 아니라 고급 브랜드 캐딜락, 픽업트럭 브랜드 GMC 등이 있습니다. 이런 브랜드의 역사와 주요 제품을 여기서 알리곤 합니다. 올해 초에도 GM은 이 곳에서 ‘타임리스 레거시’란 주제로 전시도 했습니다. ‘영원한 유산’이란 뜻처럼 캐딜락의 현재를 보여주는 에스컬레이드와 캐딜락 드빌(Cadillac De Ville)과 캐딜락 브로엄(Cadillac Brougham) 등 40~60년 안팎된 역사적인 모델을 선보였습니다.

 

이런 경향은 업계 전반에 걸쳐 나타나고 있습니다. 수입차 시장의 오랜 베스트셀러인 메르세데스 벤츠의 E클래스가 지난 2월 출시되었습니다. 11세대 E클래스입니다. 출시 행사에 가보니 행사장 앞에 1970년대 나온 1세대 E클래스부터 10세대를 한 곳에 다 세워뒀더라고요. 출시행사를 한두번 간 것도 아닌데 도열해있는 차들을 보니 역사라는 추상적인 단어가 뭔가 물리적인 형태로 구현된 것 같은 묘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게 어쩌면 브랜드가 주는 힘 아닐까요. 벤츠뿐만 아니라 BMW의 미니는 브랜드의 역사와 미래를 한눈에 보는 전시회 ‘MINI 헤리티지 & 비욘드’라는 행사를 올해 열었습니다. 일본 혼다 역시 국내 최초의 브랜드 체험공간이자 모빌리티 카페 ‘더 고'(the go)를 올해 열었죠. 롯데월드타워에서는 도요타가 ‘커넥트 투’라는 브랜드 공간을 운영하고 있죠.

현대차그룹 정의선 회장이 과거 포니 쿠페를 디자인했던 조르제토 주지아로와 복원된 포니 앞에 선 모습.
/현대차그룹

현대차그룹도 당연히 빠지지 않습니다. 작년 ‘헤리티지’ 바람을 기억하시죠. 약 1년 전인 작년 5월 현대차는 정주영 회장 시절이던 지난 1974년 현대차가 이탈리아에서 열린 토리노 모터쇼에 소형차 ‘포니’와 함께 출품한 콘셉트카 ‘포니 쿠페’를 49년 만에 복원해 공개했죠. 기아도 작년 8월 1970년대 국내 곳곳을 누볐던 삼륜차 ‘T-600’과 승용차 ‘브리사’를 복원했습니다. 현대차그룹이 싱가포르에 만든 혁신센터에도 가봤더니 정주영 회장의 책이나 어록 등이 전시돼 있더군요. 도산대로에 처음 현대 모터스튜디오를 지어서 문을 연 것이 지난 2014년 5월의 일입니다. 당시 제가 쓴 기사를 찾아보니 <“모터 스튜디오는 현대차가 차만 만드는 회사가 아니라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회사라는 점을 보여줄 것입니다.”(정의선·현대차 부회장)>라고 첫 문장이 시작되는 군요. 10년 뒤 현대차그룹을 담당하는 기자로서, 글로벌 자동차 3위 기업이 된 현대차그룹이 얼마나 역사와 브랜드에 대해 한층 더 깊이 고민하는지 생각해보는 요즘입니다.

 

자동차 업계의 이런 변화에는 배경이 있습니다. 우선 내수 침체와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올해 자동차 업계에서는 본격적으로 내수 침체가 시작됐다는 반응이 이어집니다. 고금리와 고물가로 소비 심리가 크게 위축되고 있죠. 수입차만 해도 올 1~4월 승용차 판매량은 7만6143 대로 작년 같은 기간보다 7.8% 줄었습니다. 2019년(7만380대) 이후 가장 저조한 실적이죠. 차를 사려는 사람이 줄면서 그들의 쇼핑 리스트에 후보로 오르는 일이 그만큼 더 절실해졌습니다. 좋은 차와 합리적인 가격이 최우선이긴 합니다만, ‘하차감’과 ‘자기 만족’이 중요한 한국 자동차 시장에서 브랜드가 끼치는 영향도 결코 적지 않지요. 이는 ‘가치소비’ 트렌드와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브랜드의 힘을 키워야, 그 브랜드를 단 자동차를 가치 소비하는 사람이 늘어나는 논리입니다.

메르세데스 벤츠 E클래스를 1세대부터 10세대까지 전시해둔 모습/벤츠

또 하나의 키워드는 상향 평준화입니다. 자동차를 실제로 현장에서 파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상당수 자동차들이 이제 품질 측면에서 상당히 높아졌다고요. 좀 더 단순하게 생각해보겠습니다. 일반 소비자들이 차를 고를 때 주행성능, 디자인, 연비, 수납공간 정도가 핵심이라고 봅니다. 여기에 편리한 커넥티브 서비스가 더해질 수 있을 겁니다. 안드로이드 오토나 애플 오토가 매끄럽게 연결되거나, 내장 내비게이션이 편리한 것 등이죠.

실제 많은 차를 시승해보면 이런 요소 중 디자인은 개인 취향이니 접어두더라도, 주행성능과 연비, 수납공간 등은 비슷한 가격대의 차량에서 차별화가 쉽지 않습니다. 커넥티브 서비스는 주요 브랜드가 자체적인 서비스를 개발하지 못했더라도 휴대전화를 통하면 되니까요. 그래서 요즘 특히 더욱 브랜드의 힘을 중요하게 여기는 경향이 강해지는 것 같습니다. 내가 타고 나닐 때 나의 가치를 높여주는 모빌리티, 나의 소비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는 브랜드.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고민할 거리들이 점차 늘어나는 요즘입니다.

조선일보 정한국
2024.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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